3.남북모터스 시절(3편)
* 촌놈 상경기 *
때는 1969년 12월 31일 이른 아침이었다.
동네가 온통 하얀 눈 세상으로 뒤덥히고... 유난히도 하얀 눈이 많이두 내린
그 해.... 시골 유성읍 구암리 골목길.
눈길 위를 조그마한 촌놈이 “터덜 터덜” 걸어간다. 뒤에서 보는 나의 모습이란!
꺼벙 머리에 털신 신고, 옆구리엔 옷 몇가지 싼 보자기 하나 달~알랑! 들고,
아무런 보장이 없는 미지의 세계가 있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무작정 가는 거다.
서울로 유성 촌놈이 모르는 사람에게 팔려? 돈벌러 가는 날...!
먼 길 떠나는 나를, 다른 식구들은 배웅은 없다. 그래도 바로 아랫 동생 1살 어린
상철이가 졸~졸 따라 나온다.
“兄! 어데가?” 하는 동생을 뒤로 하고, “오지마” 주먹을 쥐어 보여주며..
촌놈이 리더인 유성농고 선생님의 뒤를 따라, 나는 서울로 가는 것이다.
광주에서 유성으로 온지 겨우 보름 만에 또 다른 타향으로 나는 간다.
69년 12월 15일 야심한 밤으로 생각난다.
우리 6남매와 엄니는 전라남도 신축 광주역에서 밤 열차를 - 야반도주 - 타고
엄니 고향인 충청도 대전으로 무작정 향했다.
아부지 고향에서는 도저히 살아가기 힘들어, 담임 선생님 그 분의 알량한
곗돈도 떼어 먹고 서석동 시장통 골목 작은 집을 미련없이 버렸다.
곗돈 매월 500원씩 수금차 선생님에게서 받아오던 생각이 난다.
“이제 서울로 가면 언제 나의 집으로 올 것인가?” 하는 기약도 없었다.
나는 그냥 무작정 서울로 가는 것이다. 아무런 보장, 조건도 없었다.
나를 서울로 델구 가는 아저씨는 유성농고 선생님이고, 우리를 인수할 서울
양반은 친척이라네. 서울 양반은 첨으로 자동차 부속가계를 하려고 우리를
시골서 부탁하여 데려 간다네. 시골놈이 순진혀서 부려 먹기 존 모양이라네.
나의 인생이 엄청나게 바뀌는 전환점이라네....
용두동 서대전 삼거리에서 내려 용두시장 골목 길로 들어간다.
백여미터 걸어가서 선생은 나를 우측 골목 집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 집으로
촌놈 모두 3명이 모인 것이다.
유성 상대리 1명, 논산 1명.. 그리고 나... 역시 유성 上 촌놈~!
지금도 기억되는, 잊혀지지 아니한 서대전 3거리 광고물 “달나라 식당”.
커다랗게 아치형으로 만들어 놓은 간판.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대전역으로 촌놈 3명과 선생님은 향했다.
버스 탔나? 택시 탔던가? 하여간 역으로 우리는 나갔다. “백마호”라는 그래두
그 당시 등급이 좋은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 날, 서울 가는 기차 여행은 별로 생각나질 아니 하지만 중간에 간식으로
삶은 달걀을 먹었을 것이다.
서 울 역! 아~! 서울역이다.
말로 만, 사진으로 만, 듣고 보고 만 했던 서.울.역~!
나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
라는 서울- 에 드디어 도착하였다. 1969년 12월 31일 오후~!
기억이 나는 건, 눈 앞의 높게 놓여진 고가도로와 많은 차들,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 크고 시컴한 빌딩 숲...
우리 일행 4명은 버스 타고, 수유리로 향했다.
우리를 인계할 어르신의 집에 저녁 무렵에 도착했다. 눈이, 그 당시 엄청 많이
온 걸루 기억한다. 하긴 70년대는 정말 무지 추웠다.
그 날은, 그 집서 촌놈 3놈은 69년 70년이 오가는 하루를 보낸다.
1969년 12월 31일 저녁! 나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날 밤의 토크 쇼,
TV 흑백으로 나오는데.. 다음 해인 70년도가 “개의 해”란다. 그러면 나의 첫
서울 생활 나이는 바야흐로~ 16세 부터가 되는거다.
만화가 신동우 화백이 70이라는 숫자를 매직 펜으로 큰 종이 위에다
“쓱삭.. 슥슥” 하니 멍멍이 머리를 순식간에 그린다.
멍멍이 머리를 그려서 70년도가 “개의 해” 라는걸 재미있게 보여 준다.
저 양반 그림 참~~! 잘 그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70년 새해 아침, 1월 1일날이다.
우리 3명은 수유리에서 돈암동으로 갔다. 전차 종점 [당시 전차 선로가 그대로
방치] 부근 4거리에 “남북모터스”라는 자동차 부품 판매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두 분다 이북 출신이다.
그 곳, 주인이라는 사람에게 매매?가 되어가는 절차를 밟았다. 남북모터
사장님은 아주 멋쟁이 모습, 턱이 유난히 길게 나오고 거만한 모습에 큰소리
치는 타입인데, 수유리 아찌는 순박한 모습이다.
수유리 아저씨는 먼저 나와 논산 녀석을 선택하고, 유성 녀석은 남북모터스로 팔려갔다.
처음엔, 남북모터스 사장이 나를 달라?고 했다.
내가 맘에 드신 모양이다. 수유리 주인이 아니 된다고 한다. 자기가 미리 찍어논
아이라고 하면서.. 아주 단호하게 말씀 하시드만~
절대로 아니 된다는...! 후후.. 이거 아주 인신매매 거래더군. 나를 이리 저리
살펴보던 남북모터스 주인 하시는 말씀이.. 내가 탐이 나신 겨~
“이녀석 봐! 어깨가 쫙 벌어져, 일 잘하게 생겼으니.. 나에게 줘” 한다.
후후.. 역시 젊은? 시절 돌맹이로 만든 역기 들어 운동하던 덕분이여~!
우리 일행 3명은, 거기서 나와 곧장 마장동 상점로 갔다.
글쎄 가보니..? 시상에~! 조그마한 상가 상점인데, 아직 문도 열지 아니한
상태인겨...!! 이제 시작 하려는 자동차 부속품 상점이란다.
물건 진열장만 해놓구, 개업 준비 중에 우리를 뽑은 것이다.
그 곳에서 우리 2명은 약 10여 일을 먹구, 자고.. 즉, 식당에서 밥을 사먹구 했다.
좁은 가계 통로에서 촌놈 2명은 침낭을 뒤집어 쓰고 겨울 추위를 보냈다.
낮이나, 밤에도 하는 일 없이 마냥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참! 식당에서 식사하던 중.. 무지 웃기고 잼있는 사건 하나!
저녁에 옆 식당에서 가서 식사를 주문했다. 후꾼한 연탄난로가 따뜻했다.
주문한 따끈한 만두국 위에 노란? 덩어리가 있다. 이게 무어지?
아하! 이것 색다른 고기인 모양!! 숫가락으로 얼른 건져.. 한 입에 넣었더니~~!
어이쿠.. 메워라..!! 눈물과 콧물이 동시에 나오고. 와! 사람 쥑이드만~~!
바로 그것은 회 먹을시 먹는 와사비... 그 자체였더라.
식당안에 여러 사람들이 날 보고 촌놈?이라는 말을 할까보아, 젊잖게 얼른
손수건 꺼내어 거기에 싸서 버렸다. 휴지에 버려두 되는데...
손수건만 날라갔다. 회 먹을시 가끔 그 생각하면, 웃음이 나곤 한다.
아~~~~!! 옛날이여~~
어느 날, 아침에 수유리 주인이 우리에게 와서 짐 싸라 하신다.
자기는 개업을 할 수 없으니 우리는 남북모터스에 합류하게 되었단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게 됨..
그 양반이 날 그토록 원?하더니, 결국 가게 되는구나.
남북모터스는 당시에 가계가 무척 큰 편에 속했다. 위치는 미아리 지나삼양동
입구에 지점으로 종업원이 6명이나 되고, 주인 안집 근처 돈암동 본점은 5명정도.. 나중에 2곳 더 생겼다.
이북 출신인, 턱이 유난히도 길게 보이는 사장님.
경리 미스 하, 운전기사 3명은 삼양동에 와서 하루 판매한 돈을 수금을 해가고,
구럴시는 우리는 옆에서 조용히 대기하는 것이다.
가끔은 저녁에 지점장이 마감하여 우리가 서로 돌아 가면서 판매 대금을
시내버스 타고 돈암동 본점에 판매일지와 같이 전해 주고 왔다. 그
런 외출은 즐거운거였다. 시내구경과 시간이 좀 여유가 주어진다.
이제 나의 서울 “자동차 부속 점원 생활”은 시작이 되었다.
가족의 품에서 떠난 16세 소년의 길은, 서울의 광활한 도시의 일부분의 보이지도 아니하는 점에 불과 하지만, 모든 운명을 하늘에 기냥 맡기고 하루 하루를 의미없이 현실에만 충실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모든 숙식은 좁은 공간인 상점에서 이루어지고, 입사 순서가 막내이니 근무자들의 식사, 밥 준비는 나의 차지가 되었다. 처음엔, 고참이 직접 밥 하는거 본보기를 시범 보여준다.
나의 밥하는 솜씨는.. 참~! 라면도 어지간히 끓여 먹었다.
쌀을 찬물에 행구어 내는데, 손가락으로 사알살 저어서 허연 국물 버리고 돌을
걸르는 작업은 조리로 하여 냄비에 넣고 손바닥을 쌀위에 올려 손등 중간까지
물이 오르면 되는 것이다. 새카만 취사용 고물 석유난로에 성냥을 그어 불을
펴서 쌀 냄비를 얹는다.
시장서 간단한 반찬 사온 걸 책상에 주욱 놓구서, 된장국도 끓이고....
돈암동 안집에서 가끔 김치를 통으로 가져오고, 쌀은 포대에 담아 온다.
그래두 밥 맛은 좋더군!
그 후 난 6개월 밥 당번을 하였다. 각종 심부름과 차량부속 이름 외우기
부속품 배달가기, 저녁 조금 한가한 시간엔 공부를 했다.
나의 유일한 취미인 주판 문제지 연습, 옷 빨래도 하고.. 가끔 선배의 옷과
양말도 빨아야 했다.
많은 시련과 서러움.
선배들의 구타와 따돌림과 골탕 먹이기, 구박과 배달꾼의 고통.
배달이 늦었다고 무식한 손바닥으로 16세 어린 나의 뺨을 사정없이 쳐버리던..
무식허게 생긴 운장 아저찌~ 흥건하게 입안에는 피가 모이더구먼~
자정 가까운 시간에 선배가 깨운다.
부속품 배달 가라는 가다. 명령이니 가야한다. 졸리운 눈을 부라리며 신나게
달려 고갯길을 헐떡이며... 택시회사에 가니.. 주문 아니했다고~
69년 12월 31일 서울에 올라갔다.
71년 6월 중순에, 맘 먹은게 있어 배달 다녀온 뒤 과감하게 까까머리를 만들었다. 단골 이발소에 가서 아주 시원하게 밀어 버렸다.
다시금 집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자그만치 1년 6개월, 서울 자동차 부속 배달꾼
생활은.. 그렇게 막을 내린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의 나를, 그러한 모진 시련들이 이 자리에 당당하게 서게 해준
큰 계기가 된 것을 정말로 감사하게 여긴다.
문득~ 지난 힘들고 고생한 일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면서.. 순간에 나의
뇌리에 하나, 두울... 반짝, 반짝 빛나며 지나간다.
그 추운 겨울 아침~ 몇 겹의 면장갑과 털장갑을 끼고 자전거에 부품을 싣고
타고 가던 일.. 벙거지를 쓰고, 마스크로 무장혀도 춥던 날들...
정말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라는게 실감난다.
30년이 훌~쩍 흐른 후에도, 가끔 그 시절이 생각나는건 왜? 일까...! 순간적인
판단으로 집으로 내려와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다시 가난을 친구 삼아, 수많은
어려움과 좌절과 배고픔 그리고 배움의 시작.
다시 시작한 공부 [검정고시] - 1년만의 합격, 모두 다시 돌이켜 보면 그리움...! 모두 아련히 떠 오르는 그리움이다. 살포시 미소를 머금은다.
그려~! 러시아 사람, 푸쉬킨 詩人이 하신 말씀~~!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현재는 항상 슬픈 것..!
그래도 지나간 일은 그리워 지느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