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빡빡 머리 *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쥬?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다” 라는 말. 아녀~ 이건 틀린거유~. 그건 당연히 틀린 말이다. 우째 틀리냐?
여기 증인이 있어요. 그 누가 반문을 한다면... 산 증인을 보여 드리죠~.
나는 내 머리를 직접 깎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두번도 아닌 검정고시 시절,
즉 71년 여름부터 75년 고교 졸업 까지의 실화입니다.
준비물은 간단하죠.
머리깎기 기계는 필수.. 거울 2개와 보자기, 의자, 그리고 섬세한 손가락 감각~! 이것만 있으면 모든게 해결됩니다.
잠시~ 지나간 야기 좀 하련다.
70년 서울 “남북모터스”에서.. 유성 촌놈이 서울에 올라가~
자전거 배달로 18개월을 몸 담고, 뜻한바 있어 71년 6월 중순! 긴머리를 서울 삼양동 입구 이발소에서
싹~뚝 잘라버리고.. 그것두 빡빡 머리로..!
일~단, 무언가 결심하려면 즉시 행동 개시.
더벅머리를 “싸악~ 미는겨~!” 시원허게 머리를 밀어 버리고 미아리에서같이 일하는 대장에게 공부하러
집으로 간다고 말하니..
즉시, 그 형은 주인 아저씨에게 보고를 한다.
다음 날, 주인 아저씨가 상점에 도착하고. 나의 결정을 다시 들어 보더니 쾌히 승낙과 함께 3만원의 18개월 퇴직
위로금을 손에 쥐어 준다. 거금이었다. 71년도 6월에 3만원은 큰 거다. 여기까지가 지난 이야기임.
부속 담은 나무 박스에 짐을 싸서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엄니와 같이 유성 집에 내려 와서 보니, 남의 집 세를 얻은.. 엄청 후진 건물에서 음식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내 바로 밑의 1살 터울 상철이를 비롯하여..
막내 상섭이.. 삼형제, 누나. 상미. 상경 세 여자.. 고만 고만한 3남 3녀의 대가족이 엄니와 모두 7식구가 사는
좁은 공간이었다.
내려와서 지내다 보니... 중학교에 상철, 국민학교 상섭이의 머리 깎는 비용도 만만치가 아니 하였다.
물론 나두 깎아야 하고..
당시 두 녀석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나두 68년도 광주에서 잠시 돌린바 있는 “조선일보” 유성지국 신문 배달하는 신문돌이였다.
성실하게 잘하는 녀석들, 꼬박 꼬박 용돈을 벌어오는 동생들이었다. 녀석들, 착하기도 하지~
어느 날, 우리는 커다란 혁명을 맞이한다.
3형제가 머리를 맞대고 협의한 내용은 이렇다. 비싼 이발비를 아끼려면 이발 기구를 사서 서로를 깎아 주자는 거였다.
집 뒤편에 넓은 공터가 있었다.
지금 유성 봉명동 “유성단위농협” 근처에 5층 건물이고 국민은행, 병원 기타 여러 상점 건물이 있다.
그 커브길 자리에 허름한 건물에서, 음식장사를 했다. 우리가 69년도에 유성에 이사올 당시 그 자리 옆은
시내버스 정류장인 자리였다.
우리 3형제는 준비를 했다.
빈 공터 양지 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의자와 기타 필요한 이발기구를 가져와 차례로 돌려가며
서로 “빡빡 머리”를 만드는 거다. 이발기계로 이리 저리 머리통에 고속도로를 마구 뚫어 버린다.
우리는 처음으로 하는 이발 일이라..
자꾸 머리칼을 뽑아서 따끔거리게 하여 “야~ 아퍼! 살살해”하면 “참~아!” 하면서 낄낄 거리며 간신히 하나의
머리통을 완성시킨다.
한참 후엔... 하나의 작품이 탄생한다.
시원하게 깎인 머리통 3개는 서로 마주보며, 손가락질 하면서 서로 낄낄거리고 웃으면서 처음 작품에 약간은
만족을 하였다.
머리통 여기 저기엔 약간씩 긴 머리칼이 있음에도 불구..
우리 3형제가 합심, 협력해서 했다는 것에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당시 기계독이라는 머리깍기 기계균이 있어
우린 얼마간 고생도 했다.
그런 재미있는 작업이 한동안 지속 되었다.
어느 날, 나는 혼자 있을 경우는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처음엔 이발기구를 준비하고 나서,
동생들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놈들이 항상집에만 있는게 아니다.
노느라 정신이 없는 녀석들이 언제 올 줄 몰라서..
기다리다가, 녀석들이 오면 다시 잘 다듬을 생각에 혼자서 깎아 보기로 하였다. 식당 의자 2개를 가져와
앞 뒤로 세우고, 거울을 세운다. 그리고 보자기를 두루고.... 북 치고 장구 치고 할 참이다.
처음이라서 떨리지만..
우선 앞에서 보고 거울로 작업하는 부분은 그런데로 모양이 있게 깍이는 거다. “뜨끔 뜨끔” 거리며 아프지만
그런데로 자~알 밀었다. 옆 부분도 그럭 저럭 모양이 나온다. 문제는 뒤통수 부분이다. 이거는 이발기계를
거꾸로 잡고 하는 거라, 더욱 머리카락을 잡아 먹는다.
거울을 보면서 좌, 우로 팔이 움직인다.
몸과 눈을 이리 저리 돌려가며, 꼬마 혼자서 열심히 자기 머리를 깎는 모습을 지나시다 본 이웃 어르신들 왈!
하기야~ 무척 신기하게 본 모양.
“허~ 이것 보게나~”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다” 는데 “너는 기술도 좋구나?” 하시는 거다. 공연히
어깨가 “으~쓱” 거려진다.
나는 그런 칭찬에 신이나서 더욱 열심히 깎는 모습을 연출 하였다.
그려두, 좀 고생은 했지만 그럴 듯하게 깎여진 나의 머리통을 만져보며 흐믓하게 느끼고,
그것을 계기로 동생들이 없으면 내가 직접했다.
세월이 흘러 숙달된 조교가 되자, 거울도 필요가 없고...
오로지 손가락 감각에 의한 숙련된 예술의 경지가 되었다. 마음만 먹고
자리만 펴면 언제 어디서든 즉석 이발소가 된다.
이렇듯 “중 제머리 깎기”는 성공적 이었으니 말이다.
76년, 유성농협에 근무하고 부터는 돈을 버니,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손보게 하였다. 허지만 여기에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
절약이 몸에 배어있어 언제나, 제일 싼 이발소를 찾아 다니고 이발소에여자가 있는 곳은 가능한 피해 다녔다.
어쩌다 여자가 있는 것을 모르고 잘못?들어가면...
머리 손질 후에 면도는 생략하고 나와 버렸다. 속으로는 은근히? 기대를 해 보면서도.. 막상 한다는 것에 대한
그 무언가의 결벽증? 때문에 정식으로 하는 여자 면도사의 면도를 받아 보지 못했다.
지금?? 받아보지 구러냐구??
에궁~ 85년 결혼하고선... 머리는 이발가운 걸치구 마누리가 가위로 안방 화장실에서 이뿌게 다듬어주는
재미로 이발소에 아니가요. 면도는 집에서만 하구.... 미쵸요~! 그래두, 어릴적 “빡~빡머리”가 그리워 진다.
후~! 스님은 하지 못하는 걸~ 나는 했어유~!